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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열린 1990 FIFA 월드컵™은 수비 지향적인 경기가 주를 이루었던 대회였다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로 경기 내용에 있어 그리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대회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제 소개할 카메룬-잉글랜드 전은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열띤 경기로서 월드컵사에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잉글랜드가 카메룬을 맞아 경기 내내 고전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카메룬은 이 대회에서 아프리카팀으로는 최초로 월드컵 8강에 진출하는 성적을 일구며 잉글랜드를 맞아 대단한 선전을 펼침으로써 불굴의 사자군단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게리 리네커가 이끄는 잉글랜드는38살의 나이에도 폭발력을 잃지 않은 노장 스트라이커 로제르 밀라를 앞세운 카메룬을 맞아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진땀을 빼는 어려운 경기를 가져야만 했다. 양국은 나폴리의 여름밤을 더욱 뜨겁게 달구어 놓으며 월드컵사에 새로운 명승부를 연출하였다. 대회전, 카메룬이 8강까지 진출하리라고는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카메룬은 개막전에서 전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였고 경기를 거듭하면서 그들은 더욱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루마니아를 2-1로 격파하며 2라운드 진출을 확정하고 콜롬비아를 상대로 다시 2-1승을 거두어 8강에 진출하는 감격을 누렸다.


반면 잉글랜드는 2라운드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1-0으로 승리, 가까스로 8강에 진출하였다. 어쨌든 잉글랜드로서는 지난 멕시코 대회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게 패하며 4강 진출이 좌절된 아픔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한 셈이었다.
카메룬과 잉글랜드의 8강전은 나폴리의 산 파올로 경기장에서 거행되었다. 산 파올로 구장은 카메룬이 조별 경기에서 이변을 일으켰던 장소였다. 사람들은 카메룬이 다시 나폴리에서 강호 잉글랜드를 상대로 계속되는 이변을 연출할 수 있을지 주목했다. 사실 카메룬은 잉글랜드전을 앞두고 안드레 카나, 에밀 음보우, 빅토르 은디프, 줄레스 오나나와 같은 주전 선수들이 경고 누적으로 대거 결장하며 정상 멤버를 가동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출신의 니폼니쉬 카메룬 대표팀 감독은 이전 경기들과는 다른 새로운 라인업으로 경기에 임해야만 했다. 2라운드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상대 골키퍼인 이기타에게 뼈아픈 실점을 안겨주었던 로제르 밀라는 선발 출전에서 제외되었다. 출전 선수 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카메룬과는 다르게 바비 롭슨 감독의 잉글랜드 대표팀은 최상의 멤버를 구축한 상태로 경기에 나섰다.

긴장된 분위기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양팀은 매우 거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팀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거친 탐색전을 펼쳤고 멕시코의 코데살 멘데즈 주심은 쉴새 없이 휘슬을 불어대며 선수들의 파울을 지적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 전반 8분, 워들, 바니스, 피어스 간의 협력 플레이가 살아나며 잉글랜드가 카메룬의 골문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후 경기는 초반의 거칠고 답답한 양상에서 벗어나 점차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카메룬은 루이스 음페데와 프랑수와 오맘을 앞세워 이내 반격을 개시하였다. 음페데의 슛이 피터 쉴튼 골키퍼의 선방에 가로막히고 다시 튕겨져 나오자 오맘이 재차 슛으로 연결했으나 공은 왼쪽 골 포스트를 맞고 빗겨 나가고 말았다(12분). 여하튼 이 슛 시도가 카메룬에게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다. 이후 카메룬은 잉글랜드를 압도하며 경기를 우세하게 이끌어 나갔다. 음페데는 잉글랜드 문전을 헤집고 다니며 잉글랜드의 쉴튼 골키퍼를 위협하였다. 그는 19분과21분 사이에 두 번의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모두 무산시키고 말았다.

상승세의 플래트

카메룬의 기세에 밀려 어려운 경기를 펼치던 잉글랜드는 전반 25분 경 빠른 역습으로 선제골을 엮어내었다. 스튜어트 피어스가 좌측 측면에서 크로스한 볼이 정확하게 데이비드 플래트에게 연결되고 플래트가 이를 받아 헤딩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카메룬의 베테랑 골키퍼인 토마스 은코노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던 완벽한 골이었다. 플래트는 벨기에와의 16강 전에서도 귀중한 결승골을 성공시킨 바 있었다. 잉글랜드 관중들은 열광했고 경기장은 다시 잉글랜드를 응원하는 함성으로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롭슨 감독은 여전히 경계의 끈을 풀지 않았다.

폴 개스코인은 특유의 돌파력을 이용하여 다시 카메룬의 골문을 노렸지만 카메룬의 수비수들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다. 이후 양팀의 경기는 서로 공격의 활로를 찾지 못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카메룬의 토마스 리비가 잉글랜드 골문을 향해 헤딩 슛을 날렸지만 공은 골문을 크게 벗어났다(37분). 이러한 와중에 관중들의 시선은 트랙을 돌며 몸을 풀고 있는 카메룬의 한 선수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머리를 새롭게 단장한 로제르 밀라였다(40분).

승부카드 밀라

후반전 시작과 함께 투입된 로제르 밀라를 전담 수비해야 하는 달갑지 않은 임무를 부여 받은 선수는 폴 파커였다. 카메룬 야운데 출신의 로제르 밀라는 카메룬 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밀라의 첫 번째 슛은 잉글랜드의 골 포스트를 살짝 벗어나고 말았고 관중석의 열기는 다시 고조되었다(54분). 이번에는 잉글랜드의 리네커가 밀라의 슛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카메룬의 문전을 위협하는 슈팅을 날렸고(59분) 경기는 한층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제 밀라와 리네커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후반 16분 경, 상대 문전을 향해 돌진하던 밀라가 잉글랜드 수비수의 제지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넘어지고 주심은 즉각 페널티 킥을 선언하였다. 엠마누엘 쿤데가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경기는 동점 상황이 되었다(1-1). 카메룬의 공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관중들은 카메룬의 돌풍을 놀람과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경기장은 축제와 같은 열띤 분위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오맘의 패스를 받은 시릴 마카나키가 강력한 슛으로 골을 노렸지만 공은 잉글랜드 수비수의 다리에 맞고 굴절되었다. 잉글랜드는 카메룬의 파상 공세에 크게 흔들리며 이렇다 할 공격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65분, 밀라가 다시 일을 냈다. 밀라가 개스코인, 라이트, 플래트의 수비를 따돌리고 공을 에우게네 에케케에게 연결, 에케케가 추가골을 성공시킨 것이다(2-1). 카메룬은 열광했다.

침묵에서 벗어난 잉글랜드

경기는 불과 15분만이 남아 있었고 잉글랜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반격은 카메룬이 경기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지을 수 있는 득점 기회를 무산시킴과 동시에 개시되었다. 밀라와의 원 투 패스에 이어 오맘이 손쉽게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82분). 곧바로 반격을 개시한 잉글랜드는 리네커가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파울을 얻어냄으로써 귀중한 동점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리네커가 페널티 킥을 침착하게 성공시켜 잉글랜드가 2-2 동점 상황을 만든다(83분). 잉글랜드는 심각한 위기에서 리네커의 골로 일단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결국 경기는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연장 초반, 양팀은 신중한 경기 자세를 보이며 적극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먼저 공세를 펼친 것은 카메룬이었다. 에케케와 오맘의 슛이 쉴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후(93분) 오맘(95분), 마카나카(97분), 로제르 밀라(100분)가 연달아 슛을 날렸지만 득점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수세에 몰려 있던 잉글랜드에게 승리를 안겨준 골은 다시 리네커의 발끝에서 나왔다. 개스코인의 드루 패스를 받은 리네커가 카메룬의 골문을 향해 돌진하자 은코노와 마싱이 그를 수비하는 순간 페널티 킥이 선언된 것이다. 리네커는 다시 페널티 킥으로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잉글랜드를 4강으로 견인하였다. 지난 1986 FIFA 월드컵의 득점왕이었던 리네커의 진가가 다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승리자의 트랙 일주

리네커의 역전골 이후 카메룬은 만회골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잉글랜드의 수비는 견고했다.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카메룬의 분전도 끝이 났지만 선수들은 경기장 트랙을 돌며 카메룬이 거둔 놀라운 성과를 관중들과 함께 나누었다. 수비에 무게를 두는 압박축구가 주류를 이룬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카메룬이 적극적인 공격 축구를 앞세워 분전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

잉글랜드 또한 1966년 이후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감격을 누렸다. 그러나 숙적 독일과의 4강전을 준비해야 하는 잉글랜드의 롭슨 감독에게는 승리를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1990. 7. 1
이탈리아 나폴리 산 파올로 스타디움
잉글랜드 3 : 2 카메룬
득점 : 플래트, 리네커 2골(이상 잉글랜드), 쿤데, 엔케케


90년 대회 최고의 명승부로 선정된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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